본문 바로가기

Love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그해 여름에 비 많이 내렸고 빗 속에서 나무와 짐승들이 비린내를 풍겼다
비에 젖어서, 산 것들의 몸 냄새가 몸 밖으로 번져나오던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정맥에서는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당신의 정맥의 푸른 색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당신의 정맥은 당신의 몸속의먼곳을향했고
그정맥의 저쪽은깊어서 보이지않았다
당신의 정맥이 숨어드는 죽지 밑에서 겨드랑 살은
접히고 포개져서 작은 골을 이루고 있었다

당신이 찻잔을 잡느라고, 책갈피를 넘기느라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느라고,
자동차 스틱기어를 당기느라고 또는 웃는 입을 가리느라고 팔을 움직일때 마다
당신의 겨드랑 골은 열리고 또 닫혀서 때때로 그 안쪽이 들여다보일 듯 했지만,
그 어두운 골 안쪽으로당신의 살 속을 파고 들어간 정맥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고
사라진 정맥의 뒷소식은 아득히 먼 나라의 풍문처럼 희미해서 닿을 수 없었다.
정맥의 저쪽으로부터는 아무런 기별도 오지 않았는데,
내륙의 작은 하천에 바다의 조짐들과
바다의 소금기가 와 닿듯이, 희미한 소금기 한 줄이 얼핏 스쳐오는 듯도 싶었고
아무런 냄새도 와 닿지 않는 듯도 싶었다
내가 당신과 마주앉아서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고, 당신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당신의 시선은 내 얼굴을
뚫고들어와 몸 속으로 스미는 듯했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이끌려,건너와서
내게 닿는 당신의 시선에 경악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으로 당신에게 건너가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당신의 시선이 내게 와 닿을 때
나는 바다와 내륙 하천 사이의 거리와, 나와 코끼리 발바닥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
일시에 소멸하는 환각을 느꼈다. 그것이 환각이었을까
환각이기도 했겠지만, 살아있는 생명 속으로
그처럼 확실하고 절박하게 밀려들어온 사태가 환각일 리도 없었다
그리고 당신이 다시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숙일 때,
당신의 흘러내힌 머리카락 위에서 햇빛은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당신은 당신의 피부로 둘러싸였고 나는 나의 피부로 둘러싸여
당신의 먼 변방에 주저앉은 나는
당신의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드는 푸른 정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훈 :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 중

 

봄날 OST 'Main title'

 

 

 

'Lo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에게만 들키고 싶다 / 김종원  (6) 2007.09.12
사랑이 시작될때의 기쁨  (8) 2007.05.14
사랑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2007.05.14
사랑이란...  (0) 2007.05.12
사랑하는 남자가  (2) 2007.05.12